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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에 관한 TMI

피알게이트 2019. 10. 21. 16:29

2019년은 전시, 공연, 강연, 출판 등 각기 분야에서 바우하우스에 대해 접할 기회가 많은 한 해였습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독일 디자인은 물론 전세계 산업 디자인에 한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에 대한 TMI 썰을 좀 풀어보려 합니다.

 

<바우하우스 포스터/ⓒbauhaus100.com>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한 건축, 미술 전문 학교입니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이를 반영한 결과물들은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왼쪽부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발터 그로피우스, 주요 마스터들/ ⓒbauhaus100.com, @Bauhaus movement magazine>

벨기에 건축가인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가 설립해 현대까지 바우하우스 창립자로 알려진 그로피우스를 마스터로 임명, 그가 책임자가 되어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바우하우스에서 시도한 교육 방법과 성과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건축과 미술 전문 학교의 것으로 단정짓기 어렵습니다. 실용성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예술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사용자에게 심미적 만족감을 선사하면서도 기능성을 갖춘 산업 디자인은 물론이고, 틀을 벗어난 기하학적 형태의 그래픽 디자인이나 현대 브랜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타이포그래픽까지 현대 디자인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가면 그 끝에는 언제나 바우하우스가 있습니다. 1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됐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바우하우스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독일 디자인의 시작

1871년 비로소 국가 통일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독일은 산업혁명 대열에 합류했고, 상승한 국격에 걸 맞는 예술 문화 수준 향상을 위해 골몰합니다. 사상 철학과 문화, 음악 등 다양한 문화 분야에서 발전을 이뤘지만 유독 시각 예술 분야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이 시점 등장한 것이 디자인 연맹의 세계적 시초라고 볼 수 있는 ‘독일공작연맹’입니다.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 Ausstellung)의 포스터/ ⓒMoMa>

 

 

가내 수공업이 기업 생산으로 넘어가던 시절 독일은 급격한 산업화로 수공예의 몰락과 공산품의 질, 예술성 하락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습니다. 표준화된 대량생산으로 제품 품질이 저하됐고, 미관상으로도 투박한 제품들을 생산하게 된 거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구성과 심미성을 갖춘 대량생산품을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독일공작연맹의 빅피처이기도 했습니다. 독일공작연맹의 궁극적인 목표가 예술과 산업(기술)을 결합해서 도시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거든요.

 

이는 곧 기계생산품의 미적 규격화로 이어집니다.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이고, 강하며, 꼭 필요한 요소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한 미니멀한 형태를 갖춘 제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우하우스의 산물로 여기는 제품들을 볼 때 단순하지만 직감적이고 세련되다고 느끼는 이유도 이러한 디자인 철학 때문일 것입니다.

 

국가적 차원의 이익 도모를 위한 ‘예술과 기술의 결합’, 방법은?

독일공작연맹이 추구하던 핵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연맹 창립의 주축이었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의견이 갈립니다.

 

독일공작연맹이 창립 7년차가 되던 1914년 그간의 성과를 알리기 위한 전시회를 쾰른에서 개최하는데요. 이 쾰른 전시회 기간 동안 열린 공작연맹 총회에서 모든 창작물의 규격화를 주장하는 건축 이론가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수공예적 개성과 예술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의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하며 독일공작연맹은 내분에 빠지게 됩니다.

 

 

<왼쪽부터 1914년 쾰른 전시회를 상징하는 브로누 타우트(Bruno Taut)의 건축물 유리집(Glashaus), 앙리 반 데 벨데의 ‘공작연맹 극장’

/ ⓒ Wikimedia Commons, © 2019 VIZUS, © archdaily.com>

쾰른 전시회에서 독일공작연맹의 건축가들은 전시회를 위한 건물들을 신축하며 새로운 건축들을 선보인다.

당시 유리집 이외에도 앙리 반 데 벨데의 ‘공작연맹 극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현대적 모델 공장’

무테지우스는 규격화가 이뤄져야 계획적으로 통제된 제품을 만들 수 있고 이것이 곧 제품의 우수성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고요. 반 데 벨레는 규격화가 예술성을 억압하고 상업화시켜 창작자의 자유를 탄압하고 잠재적 능력을 쇠퇴시킬 것이라 반대했습니다.

<왼쪽부터 헤르만 무테지우스, 앙리 반 데 벨데>

 

격렬한 대립으로 독일공작연맹이 양분되기 직전 무테지우스는 앙리 반 데 벨데를 상대로 의견을 굽힙니다. 조직의 영향력을 위해서는 연맹이 분열되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무테지우스의 조직 내 영향력은 약해집니다.

 

당시 대량생산품의 예술적 개성화를 주장한 앙리 반 데 벨데에 편에 섰던 것이 이후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입니다.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교육

독일공작연맹의 지도권이 앙리 반 데 벨데를 통해 공고히 되려던 시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적국 출신이었던 앙리 반 데 벨데는 외국인 혐오 정서로 인해 감시 대상자로 전락, 결국 독일에서 추방되고요. 그가 설립한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후임 교장으로 발터 그로피우스를 추천하게 됩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산업과 예술성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교육 시설 설립을 구상했고, 바우하우스를 설립합니다.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은 건축이 그 전체나 각 부분을 포함해서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제 공예가와 미술가 사이에 가로놓인 높다란 장벽을 만드는 계급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1919년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 발터 그로피우스 -

 

<1919년 화가 라이오넬 파이닝거가 그리고 바우하우스 선언문 리플렛에 실린 목판화 ‘미래의 대성당(Cathedral)’/ ⓒBauhaus Dessau Faiundation>

 

 

사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인물입니다. 독일이 패전한 후 크게 몰락한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만이 도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방법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선 과거의 비생산적인 예술보다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모든 시각 예술을 통합한 종합 실용 예술을 선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예술(회화, 공예, 예술사 등) 외에 기업 관리(인사, 회계 등)와 같이 경영에 관한 이론 교육도 함께 받았다고 합니다.

 

<바우하우스의 예술 작업들/ ⓒBauhaus Dessau Faiundation, ⓒMichael Hoppen Gallery, ⓒarchitexturez.net>

왼쪽부터 바우하우스에서 열린 공연 뒷모습, 오스카 슐레머의 가면을 쓰고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의자에 앉은 여인의 초상, 월터 그로피우스가 고안한 미니멀리스트 리빙 디자인 가구에서 미소 짓고 있는 학생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마스터들/ ⓒBauhaus-Dessau>

1926년 데사우 바우하우스 빌딩 옥상에서 촬영한 발터 그로피우스(가운데)와 12명의 마스터들의 사진

 

바우하우스가 남기고 간 것들

바우하우스의 가장 큰 목표는 독일 사회를 개혁해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목적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산업과 결부되는 디자인을 실현한 상징적 조직이자 하나의 이념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우하우스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시절 여성이 극히 배제되어 있었고 입학을 하더라도 직물 공방으로 내몰리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요소들을 배제한 실용 디자인을 내세웠지만 수공예만큼이나 손이 많이 가고 비용도 높아 대량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은 모델들도 많았고요. 전위적인 성격도 강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우하우스에는 역사가 없다는 비판도 있었죠. 

 

하지만, 현대 산업 디자인 개념을 체계화시킨 공은 분명합니다. 특히, 바우하우스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데사우 시절(1925~1933) 만들어진 건축물과 제품들은 현대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외관/ ⓒbauhaus-dessaud.de>

 

<데사우 바우하우스 내관/ ⓒbauhaus-dessaud.de>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후, 1925년 데사우로 이전. 발터 그로피우스가 직접 설계한 ‘데사우 시립 바우하우스’ 건물은 현재까지 바우하우스와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1996년, 바우하우스의 바이마르와 데사우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로 했다.

 

 

<빌헬름 바겐펠트가 디자인한 다용도 램프들>

첫 번째 램프는 테이블 램프로 기능성이 명료하고 유려한 비율로 전체적인 균형감이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다.

바겐펠트는 테이블 램프 외에도 삶의 공간에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다용도 램프들을 디자인했다.

그가 추구하는 기하학적 구조는 스승이었던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의자들 /ⓒKnoll, Incollect, MORENTZ>

첫 번째 사진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실리 의자’다.

바우하우스 가구제작 분야의 마스터였던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의자로 ADLER사의 자전거 핸들 바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

의자 디자인이 완성됐을 때 바실리 칸딘스키가 호응했고 첫 소비자였다는 사실이 가구 제작업자에게 전해지며 ‘바실리 의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마리안느 브랜트가 디자인한 티팟들 / ⓒSotheby’s, MoMa>

바우하우스 제품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인 마리안느 브랜트의 티팟.

메탈 워크샵의 마스터였던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당시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금속 공예 분야에 그녀가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모호이너지가 워크샵을 통해 소개했던 구성주의적 심미학에 영감을 받아 순수 기하학 형태의 티팟을 디자인하게 됐다.

늙지 않는 디자인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에서 영감을 받은 또 다른 디자인과 공생하며 미니멀리스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독일의 소비재 제조 기업인 브라운(Braun)은 신바우하우스를 표방한 울름조형대학과 연계해 다양한 제품들을 디자인했고, 당시 개발된 제품들은 현대 브라운 디자인의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특히 1961년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 디터 람스(Dieter Rams)는 레코드 플레이어를 통해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줬죠.

 

<디터 람스/ ⓒVITSOE>

브라운에 합류하기 전, 디터 람스는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해 보다 진취적인 방향으로 산업 디자인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울름디자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브라운에서 미학과 기능성이 조화된 제품들을 개발하며 1960년대 브라운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디자인 공식을 세계에 알렸다.

 

디터 람스의 디자인 철학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Less but Better)’에는 세대를 넘나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담겨있습니다.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 제품이 만들어진 이유에 집중한 디자인, 단색을 통해 자연스럽고 변하지 않는 멋을 담아내는 것. 국내를 비롯한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에 전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제품들/ ⓒMoMA, VITSOE>

 

“우리가 하려는 것은 하이테크 제품을 만들어 깔끔한 패키지에 담아 소비자들이 패키지만 보고도 하이테크 제품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백색 제품을 만들어 작고 깔끔한 패키지에 담을 것입니다. 브라운사의 전자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을 제공하고자 하는 겁니다.”

 

- 월터 아이작슨의 저서 『스티브 잡스』 중

스티브 잡스도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애플에 이식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요.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는 “애플의 아이폰, 아이팟 디자인이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운 디자인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 디자인 비교/ ⓒCult of Mac>

스티브 잡스는 과거에 소니 마니아였다. 소니 스타일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소니 스타일을 개발한 디자이너 에슬링거와 손을 잡게 되는데, 이 때 스티브 잡스는 그에게 소니 스타일이 아닌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디자인을 요구한다.

‘에스펀 디자인 콘퍼런스’에서 바우하우스를 접한 이후 생각을 바꾼 것이다.

 

 

 

<금호미술관 '바우하우스 현대 생활' 전시 포스터/ ⓒ금호미술관>

 

 

현재 국내에서는 금호미술관에서 ‘바우하우스 현대 생활’ 전시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20년 2월 2일까지라고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방문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바우하우스 관련 역사 및 소장품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사이트들을 참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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